[여성]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들 :: 2020 세계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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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chforEqual'

 이번 2020년 세계 여성의 날의 표어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정당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외쳐야합니다.

 모든 여성들은 자신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여성 그 자체가 아닌 '육아와 집안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 '딸보단 아들이 먼저' 라는 사회의 틀어박힌 관념에 의해 꿈을 이루지 못하는 여성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여성이 무언가를 해내고, 꿈을 가지는 것이 사치였을 시절, 여성이기 때문에 더 빛나는 꿈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여 그 분야에서 최초라는 여성을 기록한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내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 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1946년, 서울대 법대 최초로 여성이 입학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태영. 열심히 공부하여 19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합니다. 그렇게 1952년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관 실습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당시 신민법 초안에서 여성차별조항을 발견한 후 곧바로 민법개정진정서를 작성 후 국회에 제출합니다.


  • 민법개정진정서 내용
    (1) 친권행사 어머니 제외
    (2) 양자제도 여자 제외
    (3) 재산상속 남자우선주의
    → 이들은 헌법정신에 위배
    (4) 호주제는 성차별의 뿌리


 그러나 민법 초안을 작성했던 김병로 대법원장은 크게 이태영을 호통치고 비판하였고, 신민법은 그대로 공포됩니다. 이 일로 인해 이태영은 사법관 실습 수료 후 판사 임용에서 제외되었고 이 일로 인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우리집에다가 사무소를 열었는데 안방, 건넌방, 마루방마다 우는 여자만 하루종일 앉아있으니까...
이런 불쌍한 여성만 오니까 내가 아찔하더라고... "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이태영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사무소)를 개소합니다. 남편의 외도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해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하고 남성중심의 법 체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은 1989년 통과된 3차 가족법 개정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3차 가족법 개정안 내용
    (1) 가정법원설치운동
    (2) 부모친권공동행사
    (3) 이혼 시 재산분할청구권
    (4) 호주제 폐지
    (5)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
    (6) 친족 범위 조정

 

  이후 1990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 3·1 문화상을 수상하며 여성 차별 문제와 가족법 운동에 힘 써 국민 복지 향상, 국가발전에 기여함을 인정받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꿈꾸는 사람이여, 도전하라!"

 1917년, 여의도 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본 권기옥은 비행사의 꿈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였기때문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송죽회에 가입합니다. 1919년, 친구들과 태극기를 만들어 치맛속에 숨겨 3·1운동에 사용합니다. 하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지만 이후로도 여러 독립운동에 가담합니다. 

 이후 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20년 중국으로 떠나 항공학교에 입학하려고 하지만 '여성' 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일념과 굳센 의지로 꿈을 키웠고 임시정부의 추천서로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비행사의 꿈을 가진지 6년만의 도전이었지요. 


▲ 항공학교 졸업증서


 1925년, 한국 여성 최초로 비행사 자격증을 획득했습니다. 그녀의 계획은 단 하나, '조선총독부 폭파'. 하지만 임시정부는 비행기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후 상하이 전쟁에 참전하였고 중국 공군 건설, 용병비행대 구성, 일본 왕궁과 본토를 폭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출발 당일 비행이 취소됩니다.

 이렇게 무너질 수 없었던 권기옥은 여성운동가의 모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합니다. 여성 운동가의 모임으로 남녀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획득하고 향유할 수 있게 7개항을 강령합니다. 

 1945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고, 1949년 귀국하여 공군을 창단합니다.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역할을 다 하고 전 재산을 장학 사업에 기탁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2개월 된 딸을 들쳐업고 영화를 촬영한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그녀는 체육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투포환 던지기에 나가 3회 연속 조선 신기록을 달성합니다. 이후 미술에도 끼가 있고 좋아했던 박남옥은 우에노미술학교에 입학하려고 하지만 여러 문제로 포기하여 부모님의 권유로 이화여전 가정과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결혼 강요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고 대구로 내려가 대구 일일신문사 기자로 입사 후 영화평을 집필합니다.

 1945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조선 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영화 《새로운 맹서》 의 스크립터를 담당하고 편집 조수 일을 합니다. 또 다시 부모님은 박남옥에게 선을 볼 것을 설득하며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러 갔다가 한국전쟁을 겪게 되면서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감독의 꿈을 키워온 박남옥은 2개월 된 딸을 들쳐 업고 6개월간 영화를 촬영합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장비 수급, 녹음장비 대여, 심지어는 상영관을 잡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직접 전국을 누비며 배급사를 찾아 어렵게 개봉하지만 나흘만에 간판을 내립니다.


 1959년,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잡지를 창간하여 해외 영화제에 대해 취재했으며 연출도 하고 싶어했지만 연출의 기회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남옥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미망인》 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 그게 어디쯤 가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장을 영영 떠났다. - 박남옥의 딸, 이경주



 

 어떤 것이든 최초가 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 최초가 여성일 경우는 더더욱 어렵지요.이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장을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성이 주체가 되어 한 분야의 최초의 여성이 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0년 세계 여성의 날 표어처럼 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지고 어느 곳에서도 '성' 이라는 생물학적 이유가 우리의 꿈을 가로막거나 멈추어야 하는 일은 없는 세상이 되어야합니다.

 오늘도 꿈을 위해 달리고 노력하고 당신을 루나컵이 항상 응원하겠습니다!